인터벤션 영상의학은 몸을 크게 여는 대신, 영상을 보며 아주 작은 길을 찾아 들어간다. 초음파, CT, MRI 같은 영상이 지도라면, 시술자는 그 지도 위에서 통증을 줄이는 경로를 설계한다. 이재환은 그 일을 두고 "환자가 견디는 시간을 줄여 주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기술이라는 말은 차갑지만, 그가 꺼낸 문장들은 생각보다 오래 따뜻했다.
대화는 농구에서 시작해 어머니로, 서울의 낯선 밤으로, 병원의 시스템으로, 클래식 음악과 불교 명상으로 옮겨갔다. 그러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샹볼뮈지니까지 닿았다. 한 사람의 삶은 언제나 이렇게 비약적이다. 병원에서는 정확해야 하지만, 인생은 정확한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의학은 대단한 말보다, 누군가의 통증을 조금 덜어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Interview
Paul
처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던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농구선수의 꿈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JaeHwan
농구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농구선수"라는 말이 조금 민망할 만큼 낭만이 섞여 있었죠. (웃음) 그래도 그때는 진심이었습니다. 공을 잡고 코트에 서면 시골 아이였던 제가 잠깐은 아주 넓은 세계에 들어간 것 같았거든요. 몸을 움직이고, 팀이 한 박자로 움직이고, 마지막 슛 하나에 하루의 기분이 갈리는 경험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운동을 싫어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제 삶이 조금 더 단단한 길 위에 놓이기를 바라셨어요. "너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말이 부담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미운 마음도 있었죠. 내 꿈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머니의 말은 직업을 강요한 말이라기보다, 제가 가진 성격을 먼저 읽은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경기에서도 화려한 슛보다 누군가의 길을 열어 주는 패스를 좋아했습니다. 의학에서도 비슷합니다. 전면에 서서 큰 소리를 내기보다, 환자가 조금 더 덜 아프게 지나갈 길을 만드는 일. 어쩌면 어머니는 그걸 먼저 보셨던 것 같아요.
Paul
그래서, 농구를 포기하는 순간은 선명하게 기억나나요?
JaeHwan
선명합니다. 거창한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만화처럼 비가 오거나, 코트 위에서 마지막 공을 던진 것도 아니었고요. (웃음) 그냥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운동화는 문가에 있고, 책은 책상 위에 있었는데, 제가 책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더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은 큰 결심을 할 때도 생각보다 조용하게 움직인다는 걸요.
포기라는 말이 꼭 패배를 뜻하지는 않는다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내려놓아야 다른 것을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때는 몰랐습니다. 억울했고, 아쉬웠고, 어머니에게 툴툴댔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된 뒤 환자를 만나면서 그 결심의 의미가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어머니가 원했던 것은 제 성공이라기보다, 제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Paul
시골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많이 고생했다고요. 낯선 서울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JaeHwan
서울은 빠른 곳이었습니다. 버스도 빠르고, 말도 빠르고, 사람들의 판단도 빠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골에서는 누가 어디 사는지, 누구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대충 알고 지냈잖아요. 서울은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이었습니다. 그 자유가 좋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많이 외로웠습니다.
사소한 것들이 힘들었습니다. 길 찾는 일, 말투를 감추려는 일, 늦은 밤 혼자 밥을 먹는 일, 시험이 끝났는데도 마음이 쉬지 않는 일. 촌스럽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애씀 자체가 참 촌스럽고 귀엽습니다. (웃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낯선 환경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만, 동시에 관찰하게 만듭니다.
저는 서울에서 사람의 표정을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구도 쉽게 말을 걸어 주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자세히 보게 되더군요. 병원에서도 그 감각이 중요합니다. 환자는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통증도, 두려움도, 민망함도 표정과 침묵으로 먼저 옵니다. 시골에서 온 아이의 긴장이 의사가 된 뒤에는 관찰력으로 바뀐 셈이죠.
Paul
의사의 길 안에서도 시스템과 개인 사이의 갈등을 많이 느꼈다고 했습니다.
JaeHwan
병원은 시스템 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정확한 절차, 안전한 프로토콜, 제한된 시간 안의 판단이 필요합니다. 인터벤션은 특히 그렇습니다. 작은 판단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그런데 환자는 시스템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같은 병명이어도 각자 다른 삶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술 결과가 중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날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입니다.
갈등은 거기서 생깁니다. 시스템은 평균을 위해 설계되고, 환자는 언제나 예외의 얼굴을 하고 옵니다. 의사는 그 중간에 서 있습니다. 한쪽에는 효율과 안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한 사람의 불안이 있습니다. 둘 중 하나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시스템을 무시하면 위험해지고, 개인을 잊으면 의학이 너무 차가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짧지만 충분한 문장"을 생각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도 환자에게 지금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 어떤 불편이 있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말하는 것. 거창해 보이지 않지만, 그 짧은 설명이 환자에게는 자기 몸의 주도권을 되찾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Paul
직업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버텼습니까? 클래식 음악, 독서, 특히 불교 명상을 이야기했죠.
JaeHwan
처음에는 버틴다는 표현이 맞았습니다. 의사는 익숙해질수록 강해지는 직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익숙해질수록 더 많은 것을 압니다. 어떤 일이 잘 풀렸을 때도 겸손해야 하고, 잘 풀리지 않았을 때는 오래 되짚어야 합니다. 그 되짚음이 필요하지만, 너무 오래 붙잡으면 사람이 닳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저에게 과장하지 않는 위로입니다. 말러처럼 삶 전체가 밀려오는 음악도 듣고, 바흐처럼 질서가 마음을 정돈해 주는 음악도 듣습니다. 좋은 연주는 감정을 부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시술실의 긴장 뒤에 바흐를 들으면, 손끝에 남은 힘이 천천히 빠집니다.
독서는 저를 한 사람의 직업인에서 다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려놓습니다. 의학 논문은 물론 계속 읽어야 하지만, 인문학 책은 질문의 방향을 바꿔 줍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나는 왜 이렇게 반응하는가"로요. 불교 명상은 특히 도움이 됐습니다. 저는 그것을 종교적 선언이라기보다 마음을 관찰하는 훈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숨을 보고,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 생각을 곧바로 따라가지 않는 연습입니다.
병원에서 가장 어려운 감정은 분노보다 잔여감입니다. 끝난 일인데 몸에 남아 있는 긴장, 이미 설명했는데도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장면. 명상은 그 잔여감을 조금씩 내려놓게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명상은 그 사이의 거리를 줄여 줍니다.
Paul
반가사유상 앞에서 오래 머문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반야심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인다고요.
JaeHwan
반가사유상을 보면 마음이 조금 낮아집니다. 한쪽 다리를 올리고, 손끝을 뺨에 가만히 댄 그 자세가 참 묘합니다. 완전히 떠난 사람도 아니고, 아직 세상 안에 남아 있는 사람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깨달음의 과시가 아니라 깊은 생각의 정지 화면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그 표정이 좋습니다. 웃고 있지만 가볍지 않고, 생각하지만 괴로움에 잠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의사로 일하다 보면 판단을 빨리 내려야 하는 순간이 많습니다. 그런데 삶 전체를 두고 보면 빨리 판단하지 않는 힘도 필요합니다. 반가사유상 앞에 서면 "조금 더 천천히 보라"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반야심경도 그런 의미에서 읽습니다. 이해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멀지만, 마음이 소란할 때 몇 구절을 천천히 읽으면 붙잡고 있던 것이 조금 느슨해집니다. 내가 나라고 움켜쥐는 것, 성과라고 믿는 것,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사실은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생각이 저를 무책임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해야 할 일을 조금 덜 집착하면서, 더 정확하게 하게 만듭니다.
Paul
최근 마운자로를 맞으면서 체중과 성인병 연구에도 스스로 초석이 되고 있다고요. 이 대목은 조금 유쾌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JaeHwan
유쾌하게 말해야 오래 갑니다. 체중 관리는 너무 비장해지면 금방 지칩니다. (웃음) 개인적인 건강 관리 과정에서 마운자로를 접하면서, 의사로서도 제 몸을 하나의 기록처럼 보게 됐습니다. 다만 이것은 누구에게나 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약물은 진료와 평가, 부작용 확인, 생활 습관의 조정이 함께 가야 합니다. 약은 마법이 아니고, 몸은 엑셀 파일이 아니니까요.
재미있는 것은 체중이 숫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식욕, 수면, 스트레스, 혈당, 혈압, 자존감, 가족력, 직업 리듬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인병을 연구하거나 진료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막상 자기 몸으로 경험하면 이해의 결이 달라집니다. "아, 환자들이 왜 어려워하는지 내가 너무 쉽게 말했구나" 하는 반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제 경험은 연구의 거창한 결론이라기보다 질문의 출발점입니다. 의학은 데이터를 필요로 하지만, 데이터가 시작되는 곳에는 언제나 한 사람의 생활이 있습니다. 식탁에서, 야근 뒤의 냉장고 앞에서, 회식 자리에서, 피곤한 아침 체중계 위에서 시작됩니다. 그 장면을 더 잘 이해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Paul
많은 예술적 감상을 어머니에게서 받았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미웠지만, 결국 영원히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요.
JaeHwan
어머니는 제가 예술을 직업으로 삼기를 바라신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을 느끼는 태도는 많이 주셨습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 번 더 보라고 하셨습니다. 꽃이든 음악이든 글이든, "좋다"는 말을 너무 아끼지 말라고도 하셨고요. 어린 시절에는 그 말이 대단한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어머니가 또 뭔가를 길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죠. (웃음)
그런데 지금은 알겠습니다. 감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도 조금 더 천천히 봅니다. 빨리 결론 내리지 않고, 표면 아래의 색을 보려고 합니다. 의사에게도 그런 감각이 필요합니다. 검사 결과는 흑백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환자의 삶은 늘 복잡한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미웠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농구를 두고 다툰 것도 그렇고, 제가 원하는 방식과 어머니가 바라는 방식이 달랐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뒤에는 이상하게도 미웠던 장면까지 그리움이 됩니다. 살아 계실 때는 왜 그렇게 간섭처럼 들렸을까요. 지금은 그 모든 말들이 제 삶의 배경음처럼 남아 있습니다. 가끔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도, 와인 향을 맡다가도, 환자에게 설명을 하다가도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그리움은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다른 형태로 계속 남는 감정 같습니다.
Paul
와인은 제2의 인생을 꿈꾸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1년 머물고 WSET 2급까지 취득했다는 이야기도 꽤 낭만적입니다.
JaeHwan
낭만적으로 말하면 그렇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공부할수록 모르는 것이 늘어나는 세계였습니다. (웃음) 프랑스에 머문 1년은 제게 병원 밖에서 시간을 다르게 쓰는 훈련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시간이 늘 촘촘합니다. 예약, 검사, 시술, 회진, 논문, 회의. 그런데 와인은 기다림의 결과입니다. 포도나무는 재촉한다고 빨리 자라지 않습니다. 좋은 빈티지는 인간의 계획과 자연의 변덕이 함께 만든 결과입니다.
사실 와인을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지는 아직 4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무슨 대단한 애호가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게 꼭 오래된 순서대로 깊어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짧은 시간 안에 제 삶의 감각을 꽤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와인을 공부하면 향과 맛을 배우는 것 같지만, 결국 사람을 배우게 됩니다. 같은 병을 앞에 두고도 누군가는 흙을 말하고, 누군가는 꽃을 말하고, 누군가는 그날의 기분을 말합니다. 저는 그 차이가 참 좋습니다.
WSET 2급을 준비하면서 포도 품종, 산지, 양조, 테이스팅 노트를 배웠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언어가 생긴다는 점이었습니다. 막연히 좋다고 느끼던 것을 산도, 탄닌, 바디, 향, 피니시 같은 말로 나누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의학과도 닮았습니다. 환자가 "아파요"라고 말할 때 그 통증을 위치, 양상, 시간, 강도, 동반 증상으로 나누어 듣는 것처럼요. 언어가 생기면 감각이 더 선명해집니다.
특히 부르고뉴를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샹볼뮈지니의 우아함은 참 이상합니다. 힘을 과시하지 않는데 오래 남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섬세해서 놓칠 뻔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섬세함이 얼마나 큰 힘인지 알게 됐습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큰 사람이 늘 강한 것은 아닙니다. 조용하지만 자기 결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샹볼뮈지니를 마실 때 그런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더 고마운 것은 같이 즐기고 마실 동지들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좋은 병은 혼자 마셔도 좋지만, 결국 누군가와 나눌 때 이야기가 됩니다. 앞으로의 삶이 아주 외롭지는 않겠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 서로의 취향을 놀리고, 때로는 별것 아닌 안주 하나에도 크게 웃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큰 위안입니다.
Paul
그래서? 와인에는 정말 인생이 담겨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취해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JaeHwan
둘 다죠. 취기가 해석력을 높여 주는 날도 있습니다. (폭소) 하지만 정말로 와인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밭에서도 해마다 다르고, 같은 병도 열리는 순간과 마시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다 보면 아무것도 못 마십니다. 조금 부족한 온도, 조금 서툰 잔, 조금 시끄러운 식탁에서도 좋은 와인은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인생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늘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지만, 실제 삶은 대개 조금 어긋난 상태로 진행됩니다. 어머니와 화해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시간이 늦었을 수도 있고, 내가 좋은 의사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여전히 부족한 점이 보일 수 있습니다. 와인은 그런 불완전함을 미워하지 않게 해 줍니다. 산도와 흙내음, 햇볕과 비, 기다림과 상실이 함께 들어 있는 맛이니까요.
Paul
최근 읽은 책 이야기도 해 보죠. 한나 아렌트, 미셸 푸코, 그리고 피에르 부르디외의 상징 자본에 관심이 생겼다고요.
JaeHwan
나이가 들수록 철학이 추상적인 장식이 아니라 생활의 도구처럼 느껴집니다. 젊을 때는 철학이 멋있는 문장처럼 보였습니다. 요즘은 그 문장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 때 비로소 쓸모가 있다고 느낍니다.
한나 아렌트는 개인이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생각을 멈추는지, 또 어떻게 책임을 회피하는지 묻게 합니다. 병원 같은 거대한 조직 안에서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절차대로 했습니다"라는 말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 말이 모든 윤리적 고민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이 어떻게 몸을 분류하고 관리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의학은 사람을 돕는 지식이지만, 동시에 사람을 규정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부르디외의 상징 자본도 많이 생각합니다. 학력, 직함, 병원 이름, 전문 분야, 논문, 학회 활동 같은 것들이 사회 안에서 신뢰의 형태로 작동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전문성은 훈련과 검증을 필요로 하니까요. 다만 상징 자본이 사람을 지나치게 빨리 위계화할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그 구조 안에서 혜택을 받았고, 동시에 그 구조의 압박을 받았습니다. 제가 살았던 시대상황과도 맞물립니다. 좋은 학교, 좋은 병원, 좋은 직함을 향한 압력 속에서 우리는 종종 "나는 누구인가"보다 "나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먼저 배웠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제 직함이 저를 설명해 주지만, 저를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사 이재환, 교수 이재환, 연구자 이재환이 있지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 명상 중에도 잡생각이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웃음) 철학은 그 여러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해 줍니다.
Paul
클래식 음악과도 더 친해지고 싶다고 했습니다. 은퇴 후 목표가 꽤 장대하던데요.
JaeHwan
언젠가 시간이 더 생기면 구스타프 말러와 안톤 브루크너의 전곡에 제대로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말러는 삶의 모순을 너무 크게 끌어안는 작곡가처럼 느껴지고, 브루크너는 아주 느리게 세워지는 성당 같습니다. 아직은 제가 그 음악들을 충분히 듣는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가까워지고 싶은 음악이죠.
그래서 최근에 JBL 스피커와 마란츠 SACD 플레이어를 들였습니다. 음악과 친해지겠다는 순수한 마음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카드 명세서를 보면 순수함에도 비용이 따르더군요. 거의 과다출혈이었습니다. (폭소) 그래도 좋은 소리로 음악을 들으면 하루의 밀도가 달라집니다. 병원에서 돌아와 말러의 긴 호흡을 듣거나, 브루크너의 느린 상승을 따라가다 보면 급하게 판단하던 마음이 조금 늦춰집니다.
저는 클래식 음악을 지식으로 정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 많이 알고 싶지만, 먼저 더 깊이 듣고 싶습니다. 한 악장이 끝날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 연습, 조용한 부분을 견디는 연습, 클라이맥스가 오기 전의 긴 시간을 신뢰하는 연습. 어쩌면 음악은 남은 인생을 설계하는 방식과도 닮았습니다.
Paul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보니 일장춘몽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조금 진지한 결론으로 가 보겠습니다.
JaeHwan
정말 그렇습니다. 바쁘게 살 때는 모든 일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험도, 수련도, 승진도, 논문도, 병원의 하루도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면 많은 것이 이미 지나가 있습니다. 화해하지 못한 말,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한 시간, 지나치게 심각하게 붙잡았던 경쟁, 별것 아닌데 크게 웃었던 저녁. 다 꿈처럼 흩어집니다.
의사로 일하면 죽음을 자주 봅니다. 하지만 죽음을 자주 본다고 해서 자기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직업적 거리감 뒤에 숨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요즘 제가 생각하는 웰다잉은 의학적 선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연명의료, 통증 조절, 가족과의 의사소통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실존으로서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과하고, 잘 감사하고, 잘 내려놓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저는 앞으로 의사로서도 웰다잉을 더 깊게 생각하고 싶고, 개인으로서도 준비하고 싶습니다. 내 삶의 마지막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논문 몇 편, 직함 몇 개도 의미가 있겠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덜 아프게 지나가도록 도왔는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했는가, 내가 받은 감상을 다음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건넸는가가 남을 것 같습니다.
Paul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한 인간으로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고 싶습니까?
JaeHwan
예전에는 인생을 설계한다고 하면 무언가를 더 이루는 쪽으로 먼저 생각했습니다. 어떤 자리에 가고, 어떤 논문을 쓰고, 어떤 성과를 남길 것인가.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남은 인생은 더 높이 올라가는 일보다 더 깊이 감각하는 일에 가까웠으면 합니다.
책은 제가 너무 쉽게 확신하지 않도록 붙잡아 줍니다. 음악은 제가 서두르지 않도록 호흡을 늘려 줍니다. 와인은 기다림과 나눔을 가르쳐 줍니다. 미식은 삶이 거창한 사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잘 익은 재료와 좋은 대화, 적당한 배고픔과 감사로도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런 세계가 제게는 점점 더 소중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더 키우고 싶습니다. 의사로서 환자를 더 잘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곁에 있는 사람의 피로와 외로움을 더 늦게 판단하고 더 오래 바라보고 싶습니다. 결국 좋은 삶은 취향을 세련되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책과 음악, 와인과 음식이 나를 조금 더 너그럽고 섬세한 사람으로 만들 때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반환점을 돌아보면 인생은 정말 일장춘몽 같습니다. 그렇다고 허무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꿈처럼 짧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덜 과시하고, 조금 더 깊이 듣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잔을 나누며, 마지막에는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고 담백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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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
Editor Note. 이 문서는 공개 자료로 확인한 프로필과 논문 정보를 바탕으로, 본인 검토 및 동의를 거쳐 매거진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한 발행용 원고입니다. 마운자로 관련 문장은 개인 경험을 다루는 원고상 표현이며, 의학적 권고나 치료 지침이 아닙니다.